성경연구

성경맥잡기학교 - 신약 126

관리자 0 3,797 2021.02.07 08:53
성경맥잡기학교 - 신약 126, 고후 3장-2
3:12-18,  자유의 성령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이 주님께 기도하며 물었다. “주님,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어떤 일을 해야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때 주님이 대답하셨다. “너 자신이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사역보다 너 자신을 원한다. 나의 명령을 행하는 것보다, 나의 사역을 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갈망하고, 추구하도록, 나와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도록 네가 가르치기를 원한다.” 참으로 가슴이 찡한 말씀입니다. 눈물이 글썽이는 심정이죠? 우리는 이 일로 주께 감사하고, 주께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하나님,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합니다. 주님께 드려지게 하옵소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주님께 감동하고 주님과 친밀감을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13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본문의 배경입니다. 3500년 전, 시내산의 모세는 40일간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사귀었다. 왜 하나님이 모세와 이렇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의롭고 정결해서 그랬습니까? 모세가 남보다 더 의로워서입니까? 더 정결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모세와 우리와 똑같은 보통사람에 불과합니다. 모세도 혈기를 부리고, 실수를 했다. 허물이 있는 보통사람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그냥 그를 대표선수로 뽑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지명하셨다. 그를 의롭다 하시고, 정결케 하셨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부르실 때도 동일합니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 의나 내 깨끗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자격을 주시고,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모세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용기와 믿음과 자신감을 주신다. 그리하여 모세는 40일 간 먹지도 안고 마시지도 않았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었다. 40일간 먹을 필요도 없었다. 배고픔도 없었을 것이다. 신령한 축복의 시간 40일이었을 것, 행복 그 자체의 기간이었다.

  오래 하나님과 사귀다보니,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 그런데 본인은 몰랐다. 산에서 내려와 백성을 만나려 하는 데, 백성들이 쳐다보고 두려워서 도저히 바로 쳐다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발 우리에게 나타나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수건을 쓰고 갑니다.
  수건은 무엇입니까? 아무튼 얼굴을 다 가리워서 보이지 않게 하는 너울 같은 수건을 말합니다. 이를 쓰고 모세는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얼굴의 광채가 너무 강해서 직접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냥 음성만 듣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합니다.

  구약시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면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수건을 써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말씀을 하게 했다.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스스로 작아지십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작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스스로 작아지셨다. 이것이 ‘눈높이’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세계로 우리가 눈높이를 낮춥니다. 우리가 어린이와 이야기하려면 어린아이 같은 수준으로 낮추어야 합니다. 젖이 ‘찌찌’, 음식이 ‘맘마’, 어머니가, ‘엄마’가 됩니다. 그래야 말이 통합니다. 결국 내가 어린이만큼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만큼 손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듣습니다.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진리를 상징을 통해 말함으로 진리가 작아졌다.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빛같다, 소금 같다, 여우같다 하면, 진리가 그만큼 작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덮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구약을 읽을 때에 오히려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은 예표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아브람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는 먼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가 상당히 축소되고 작아졌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전부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다. 구약을 오실 메시야를 나타냅니다. 빨리 메시야 예수님이 오시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사 7:14)는 예언을 믿고 많은 노처녀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살면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보려고 했다. 아무튼 저들은 메시야를 기대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메시야가 어디서 나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베들레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아기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떠들기만 합니다. 또 메시야가 오셨다. 이적을 행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다.

  이 십자가 사건이 예표적이다. 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짐승을 잡아 바치면(제사제도) 뭐하는가? 결국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구약은 예언되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림자이고, 본체는 예수 자신이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런데 영접하지 않았다. 반대로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왜 이렇게 했을까? 바로 수건이 벗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악해서 벗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14절,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마음이 완고하면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수건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못된 버릇이 있다. ‘고착증’(fixation)이다. '아이들이 커서도 손가락을 빠는 현상’ 왜 그런가? 어릴 때 젖꼭지를 빨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공갈젖을 물고 다닌다. 이것이 고착현상이다. 미국의 만화 작가 찰스 슐츠가 <Peanut>이라는 만화를 그렸다. 그 주인공 라이너스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항상 조그마한 담요조각을 가지고 다닌다. 어렸을 때 자신이 누워 잤던 담요이다. 이걸 깔고 눕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물었다. ‘너, 앞으로 대학생 돼도 그거 가지고 다닐거야?’ 그가 대답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도 버릴 수 없죠. 이 담요를 뜯어가지고 운동복을 만들어야 될까봐요.’ 고착 현상입니다. 버려야 하는 데 버리지 못합니다. 영적인 고착현상이 있다. 율법은 그림자이다. 율법은 예표이다. 그런데 본체이신 예수님이 왔는데도 율법을 붙들고 있다. 율법이 옳은 줄 안다. 얼마나 잘못 되었나? 유대인들은 메시야 예수님을 기다렸는데, 정작 예수님이 오시니까 배척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 율법 자체가 또 하나의 수건이다. 율법의 본질이 뭐냐?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거기에 수건을 덮어씌웠다. 뒷면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한다. 본체는 사랑하라는 것인데, 수건을 씌워놓고 있다. 그래서 알맹이는 빼먹고 껍데기만 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알맹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고착화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건을 벗어야 한다. 고정관념을 벗어야 한다. 열등의식도 벗기고 죄의식도 벗기고 편견도 벗어야 한다. 다 벗고 주님을 바르게 가까이 만나야 한다. 주님과 직접 만나 그 체험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주님이 친히 오셔서 일하신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게 하신다. 그리고 내가 믿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되어 감추어졌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16절,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수건이 벗겨집니다.

결론 17절이 중요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지금’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주님은 영으로 계신다. 지금 주님은 영이시다. 그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역사가 있다. 죄로부터 자유하다. 잘 깨달았다. 충만함이 있다. 주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영은 자유롭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특히 수건이 벗어지고 나니 환하게 통한다.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고 내 운명을 보고 그 사랑 안에 있는 나를 본다. 그 순간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다.

거기에 진정한 구원이 있다. 그래서 성령은 자유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분이 잇고 생활 철학이 있다.   

찬송/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적용/
 1. 자유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그러합니까?
 2. 우리의 소망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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