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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1-7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관리자 0 1,392 2021.01.10 09:46
롬 1:1-7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작곡가 이권희 집사님이 그의 대표곡인 <사명>을 작곡한 배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 선교동영상을 보던 이 집사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제가 저 곳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고 환상을 보았습니다. 흰 옷을 입으신 아버지가 이 땅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입니다. 그 옆에 독생자 예수가 다가와 “아버지 나를 저들에게 보내주십시오. 목숨도 아끼지 않고 아버지를 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잠시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들을 끌어안고 한참 우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영감으로 작곡한 ’사명‘은 영어, 일어, 몽골어 버전 등으로 번역돼 세계의 많은 크리스천들의 입을 통해 불리며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하는 사명을 되짚어 보게 합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죽어가는 저들을 위해/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나는 달려가겠소/목숨도 아끼지 않겠소/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나는 사랑하겠소/세상을 구원할 십자가/나도 따라가오/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나를 버리길 바라오/
생명을 버리면서 까지/나를 사랑한 당신/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나도 사랑하오.“
  로마서는 참으로 귀한 성경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수많은 위인들이 사명을 받았고 변화시킨 성경입니다. 어거스틴은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이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를 통하여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신학자로 바뀌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 빌라도의 층층대에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을 통하여 의인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의 중심이요 순수한 복음이다.” 장로교의 창시자 캘빈도 1:17 통해 새로워지고 신학을 바로 세웠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도 로마서를 통하여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영국의 존 번연은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천로역정을 환상을 보았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도 로마서를 통하여 복음적인 신학 체계를 세웠습니다. 로마서는 반지의 보석입니다.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 볼 때 반지의 보석이 바로 로마서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는 총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
 1-8장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즉 교리를 말씀합니다.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을 얻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한다.‘
9-11장은 역사를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구원의 이방인에게로 넘어갑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유대인들도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12-16장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을 말씀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넘어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자아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아 정체성을 늘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막이 열리면 놀라운 선언이 시작됩니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세 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1. 나는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1). 
  이게 뭐 그리 대단한 말입니까? 반문하고 싶지요? 여기서 종이란 말은 로마 시대 노예(bondslave)를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에는 인구 1/3이 노예였습니다. 노예시장에서 물건처럼 팔려가는 노예를 생각해 보세요. 노예는 자기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생동안 주인의 소유물로 살아갑니다. 자기 의지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자녀도 자기 자녀 아닙니다. 재산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예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 신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수백 년간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바벨론에서 종으로 포로 생활하던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종살이를 종식시켜 주셨습니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엄청난 선언이요, 충격적인 자기 이해입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고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입니다. 가문이 좋고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예수님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강제적이었습니다. 무서운 증오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수가 앞에 있었다면 침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강한 빛을 비추시며 찾아오셨습니다.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친구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너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부르셨을 때 반항할 수 없고 도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노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를 쓸 당시,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자원해서 자신을 바치는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심규섭’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축복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2. 나는 사도다. 나는 사도로 부름 받았다(1).

  바울은 고백합니다. 종은 종인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사도’라는 이 단어는 당시 황제나 왕으로부터 특수한 사명을 띠고 파견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의 대사(ambassador)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며 그 나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받고 파송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명을 맡기신 분을 뵙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임무를 위해 목숨을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거룩하힌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내시는 분을 만난 사람이라야 그 사명에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자격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 뵈었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뵈었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뵙고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을 보내신 주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님이 자신을 부르시고 놀라운 사명을 맡기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까? 좁은 의미로는 열두 제자 같은 분만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한다면 모두 사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 앞에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항상 이 보냄 받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시길 축원합니다.

3. 나는 복음 전파자이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선택받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자신이 본래 날 때부터 복음을 위해서 태어난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합니까? 나도 복음을 위해 태어났고, 나도 전도하기 위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소명에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머니 태로부터, 날 때부터 복음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복음 이외엔 소원이 없었고, 복음만 전파된다면 어떤 고생이나 역경을 당해도, 배신이 있어도, 살아도 심지어는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빌 1장, ‘투기와 분쟁으로 하든지, 좋은 뜻으로 하든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즉 복음만 전파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에 복음을 위해 태어났고 복음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악역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 받은 자라고 상상해보세요. 군대에 ‘영현계’라는 보직이 있습니다. 군인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화장해서 처리하여 박스 속에 넣어서 그의 집까지 갖다 주는 일을 합니다. 출장도 할 수 있죠. 시간도 좀 자유롭죠. 그래서 편하고 좋은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방으로 죽은 군인의 뼈가 담긴 박스를 가지고 그의 시골집으로 가면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어떤 놈이 내 아들을 죽였느냐?”하면서 작대기를 들고 나와 때리려고 위협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혼줄이 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임무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복음, 좋은 소식이란 단어가 언제 처음 사용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오랜 기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등장하면서 해방의 명령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지금부터 자유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 이 복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은 얼마나 좋은 소식이었겠습니까? 이때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고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만나는 사람이나 우리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자유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잘 전하시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바로 2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소개합니다. 마음이 너무나 급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도 이 복음 때문이다. 내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것도 이 복음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선택된 것도 바로 이 복음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빨리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바로 말씀합니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은 단순히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전부터 있었던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고하셨고 약속하셨던 소식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어느 날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사람들의 죄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을 맛볼 것이다.”
  그는 복음을 두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약속에 대한 성취입니다. 만약 약속이 있는 데 현실 속에서 성취되지 않으면 그 약속은 헛 것입니다. 또 현실이 있는 데 약속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과 성취는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약속하셨고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약속이 있습니까? 그 약속의 성취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삽니다. 이 땅에서도 심령의 천국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잘 하려면 하나님도 잘 알고 사람의 사정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3-4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육신과 영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33 년간 계셨습니다. 참 인간이십니다. 여기서 기독교가 시작됩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유대교입니다. 육신으로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셨다는 현실, 이 성취가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한 인간이시고 동정녀로 태어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시작되면서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한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주무셨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피로를 느끼셨고 목마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던 그 예수님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구원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며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신적인 것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반쪽이 됩니다. 완전한 구원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믿고 인정하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지 인간일 뿐입니까?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2.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4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3절에서 다윗의 혈통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 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셔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인들처럼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위로 걸으시고, 수많은 환자들은 낫게 하셨던 주님,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던 주님,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도록 기적을 베푸셨던 주님,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가?’라며 간교하게 질문하며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죠. 사람이 사람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실까요? 정확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겸비하신 분이십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모든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인하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합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사정을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또한 그는 참 인간이시므로 우리 인간의 사정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 화해자가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위하여, 그리고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변하게 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령으로 선택을 받았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이 선택하셔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사세요. 예수님이 보내신 자이므로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복음 전파자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예수님을 전하며 사세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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